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문단 편집) == 번외 : 1차 캉브레 전투 == 1917년 11월 20일 파스샹달 전투가 끝난지 14일 뒤, 그리고 플랑드르 전역이 종료된지 10일 뒤에 캉브레에서 영국군 사상 최초로 전차를 대규모로 동원, 집중운용한 캉브레 전투가 벌어진다. 연합군측 작전계획은 연합작전으로 구상되어졌으며, 파스샹달까지도 전차는 단순히 전선 돌파용으로서 소규모로 분산투입되었다. 캉브레 전투의 주 목적은 특정 지역을 점령하기 보다는 전차 운용이 용이한 지형에서 대규모 기갑세력을 대동하고 대대적인 전차전을 벌여 적의 전력을 분쇄, 전선을 와해시켜 돌파함으로서 독일군의 주요 보급/병참기지였던 캉브레에의 타격을 가해 독일군의 전력을 깎고, 독일의 전선 측면을 아군 공격에 노출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 전투는 '''1차대전 최대의 기갑전으로 기록[* [[쿠르스크 전투#s-5.5|프로호로프카 대전차전]]의 1차대전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되었다고 하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기갑세력을 집중운용한 전투가 되었다. 파스샹달이 헤이그의 호언장담과 다르게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기 때문에 헤이그는 어떤 형태로든 만회할 성공을 찾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차대(Tank Corps)의 사령관 휴 엘리스 준장이 제3군 전선에서 전차로 기습공격을 하자는 착상을 내놓았고, 제3군 사령관 줄리언 빙은 이런 과감한 계획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빙의 포병 장교 중 하나인 제9 스코틀랜드 사단의 헨리 튜더 준장은 기습 포격을 통해 전차를 지원한다는 나름의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이런 계획은 적군에게 공격의 사전 경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줄리언 빙은 17년 8월에 이 둘의 계획을 승인했고, 영국 원정군 사령부도 10월 13일엔 원칙적으론 승인했다. 11월 10일 줄리언 빙의 강권에 따라 헤이그는 엘리스-튜더 계획을 승인한다. 파스샹달에서 전차가 사용되었지만, 플랑드르의 뻘밭에서 무겁고 둔중한 전차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전차부대는 마르고 단단한 땅을 찾아 나섰고, 그 결과 이프르 45일 남쪽 캉브레가 적합한 전장으로 선정되었다. 헤이그는 자신의 대규모 공세가 멈출 때에야 공격을 허락할 것이었는데, 이제 공세가 멈췄다. 그러나 막대한 피해로 인해 전차 공격에 할애할 보병 증원군은 없었다. 계획은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300대의 전차로 캉브레에서 시작하기로 계획되었다. 전차 공세에 그래도 있는 인력을 어찌됐든 쥐어 짠 9개 사단이 뒤따르고 1,000여 문의 포가 지원 할 예정이었다. 1만 야드(약 9,000미터)의 간격으로 진격하여 탱크는 전선을 뚫고 보병은 뒤따라서 포로를 습득한다는 것으로 써 참호를 건너기 위해 전차에 나뭇단을 떨어뜨려 다리로 쓸 계획이었다. 한편 캉브레 반면의 독일군은 제20 국방대사단과 제54 예비군 사단이 150문의 포로 방어하고 있었는데, 협상국에 불운하게도 제20 국방대사단은 4등급의 취급을 받을 정도로 열악했지만, 제54 예비군 사단은 사단장 폰바터(Oskar von Watter, 1861~1939)가 포병 출신으로써 전차의 잠재성을 높이 여겨 참호에서 이동 표적을 타격하는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11월 20일 06:30경, 381대의 전차가 예비 폭격도 없이 밀집 대형으로 전진했다. 이 돌격으로 세 겹으로 구성된 독일 방어선을 모두 넘어서 5마일을 전진했는데, 이는 수십만의 애꿎은 젊은이들을 희생시킨 솜과 이프르의 전과보다 더 큰 성공이었다. 이 전투로 첫날 영국은 1,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만 명의 포로와 200문의 포를 노획한 대 성과를 이룩했다. 이번 전쟁에서 처음으로 단 한 번, 런던에서 교회의 종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울릴 정도 였다. 독일의 루프레히트는 전 독일군의 방어선에 기습공격이 예상되며 평온한 전선은 이제 없다고 우려하는 기록을 남겼다. 문제는 이런 뜻하지 않은 대 성과에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활용이 미비했다. 보병은 전차의 진군 속도를 따라 잡지 못했고(다만 전선 중앙에 위치한 제51 하일랜드 사단의 사단장 조지 하퍼 장군은 전차를 너무 바짝 뒤따르게 되면 전차가 집중공격 받으면서 동시에 바로 뒤에 병사들도 많이 피해를 볼 것이라 판단하여 150야드[140m]에서 200야드[180m]의 거리를 두고 따라 가라고 지시했다. 이것이 캉브레 전투의 영국군의 파멸을 가져올 줄 그 누구도 몰랐다.), 기병은 독일군의 기관총 공격에 쉽게 무너졌다. 주역인 전차는 이튿날엔 동원 수의 절반이 기동불능에 빠져 버렸다. 폰바터 장군이 조련한 제54 예비군 사단에서는 반대로 영국군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보조하기로 한 제51 하일랜드 사단이 너무 뒤쳐진 바람에 플레스키에르 마을 근처에서 1대 씩 파괴되고 심지어 멈춰진 11대의 전차 중 5대는 쿠르트 크루거(Kurt Kruger)란 독일군 중사에게 파괴되었다. 쿠르트 크루거는 제51 하일랜드 사단의 병사들이 따라잡았을 때 비로소 사살되었다. 뒤쳐진 결과로 보병사단은 약속된 지점에 합류하는데 실패했고, 공세가 시작된 캉브레 전선의 좌익과 우익은 독일군 진지 전체가 파괴된 반면, 중앙에서는 영국군 쪽으로 돌출부가 튀어나와 줄리언 빙은 엘리스와 튜더의 혁명적인 계획으로 얻어야 할 명쾌한 돌파를 얻는데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독일군은 곧바로 예비 병력을 투입했다. 이 전투에서 스톰트루퍼가 동원되어 큰 활약을 하게 된다. 열흘 뒤 약간의 땅을 획득한 채 기껏 차지한 영토를 모두 잃어 버렸다. 전투에서 영국군은 75,000명의 사상자(10,000명 가량의 전사자)를 기록했고, 독일군은 54,000명 가량의 사상자(약 8,80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이후 독일군은 불롱 능선과 캉브레에 병력을 강화시켜 주둔하게 된다. 큰 기대는 큰 실망으로 바뀌었다. 군사법원은 전투의 실패가 모두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의 잘못이라고 정식 보고를 냈다. 어쩌면 실패의 가장 큰 책임자였던 장군들은 책임을 회피하는데 성공 한다. 여담으로 배틀필드 1의 첫 미션은 이 때가 아닌 백일 공세 시기의 2차 캉브레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youtube(rAz6G1NVMYk)] 레고를 이용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캉브레 전투를 재현한 사람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